바쁘고 쪼들리는 10-20대를 위한 민지와 민수의 예산한정 덕질 & 라이프 스타일 보고서

동묘 바이닐 구매 후기 (민지)
예산: 2만원
태릉입구역 주변에 살 때, 매번 그냥 지나쳐 가던 역, 동묘앞. 가까웠지만 역 밖으로 나가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바이닐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는 속물스런 소문에 동묘앞역 밖으로 처음 나와봤다. 시끌벅적한 사람들과 상인들. 스탠리 큐브릭 DVD 박스셋이 단돈 만 원에 팔리고 있었으며, 역 앞에 놓인 만물상(aka 쓰레기장)엔 부러진 통기타 넥만 달랑 팔고 있었으니, 최근 바이닐 문화가 재조명받으며 바이럴을 타고 있는 빈티지 레코드 샵엔 어떤 바이닐이, 어떤 가격에 팔리고 있을지, 나를 기대에 가득 차게 만들더라. 잠시 세계 과자점에 진열된 형형색색의 하리보 젤리에 눈이 멀었지만, 내 본분 LP를 위해 정신을 차리고 레코드 샵으로 곧장 향했다.
내가 오늘을 위해 한정한 금액은 단돈 이만 원. 동묘에서 반가운 이름이 저렴한 가격이라면 무조건 구매할 각오였다. 그렇게 첫 번째로 찾아낸 레코드 샵은 ‘사구팔구’. 자음 순으로 잘 정돈된 진열대에 한 번 놀랐고, 우리가 처음 방문한 시점부터 끝까지 앞치마를 둘러매고 바이닐 클리닝만 하시는 사장님의 깔끔함에 두 번 놀랐다. 그리고 여기서 찾은 재즈 음반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의 [Time Out]은 민트급 바이닐이었는데, 언제 프레싱된 판인지 확인은 못 했으나, 가격은 삼만 원이었다.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 이만 육천 원 대에 구매할 수 있는 앨범. 지금에야 알았다.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다고. 이외에도 반가운 이름이 가장 많이 보인 샵이었지만, 내 한정된 금액인 이만 원에 너무나도 과분한 바이닐 밖에 없어,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또 나오는 도중 한 커플이 사구팔구는 ‘와썹맨’에 등장한 레코드 샵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어쩐지 바이닐 문화에 관심이 전혀 없을 법한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들락날락하더라니...

그렇게 청계천을 가르는 다리를 건너 다음으로 방문한 레코드 샵은 ‘장안 레코드’. 아주머니께서 찾는 바이닐이 뭐냐고 계속 물어보셨다. 아니 바이닐 디깅은 천천히 구경하면서 찾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들었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하니, 일단 머릿속에 곧바로 떠오르는 한국 가요 ‘도시 아이들’, ‘사랑과 평화’, ‘들고양이’ 등이 있냐고 여쭤보았다. 아주머니께선 모두 있지만, 비싼 바이닐이니 저렴한 바이닐을 찾는다면 주소를 잘못 찾았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렇게 궁해 보였을까? 하긴 산발같이 머리를 기르고 있었으니, 그렇게 보일 법도 했겠다. 실제로도 궁하기도 했고..

아무튼 비싸다는 말에도 고집을 부려 진열장으로 향했고, 도시 아이들의 [달빛 창가에서]를 찾아냈다. 가격은 이만 원. 그리고 사랑과 평화 [한동안 뜸 했었지] 는 무려 십만 원. 실제 가격을 눈으로 확인하니 그제야 발을 돌릴 생각이 들더라.
다음은 바로 옆에 자리한 ‘돌 레코드’ 를 방문했다. 바둑을 두느라 바쁘신 사장님과 쪼그려 앉아 열심히 LP 클리닝을 하고 계신 과묵한 직원을 뒤로 바이닐을 탐색했다. 앞서 방문한 두 샵에 비해 뒤죽박죽, 갈피를 못 잡았던 터라, 진열 가이드를 듣고자 내 궁핍한 지갑 사정과 저렴한 바이닐을 찾는다고 사장님께 직접 말씀드렸다. 피식 웃으시며 커버도 없고, 재생 또한 되지도 않을 오백 원짜리 더미 바이닐이 저기 구석에 수북이 쌓여있다고, 그중에서 찾아보라 말씀하셨다. “감사합니다” 라곤 했지만, 수명을 다해 PVC 조각에 불과한 검은 원판을 보고 있자니, 왠지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사방 온 천지 바이닐로 그득히 채워진 샵을 그렇게 쉽게 나갈 순 없었다. 그래서 눈 대강으로 바이닐을 디깅했는데, 마돈나(Madonna) 의 베스트 트랙 컴필레이션이 눈에 보이더라. 가격을 물어보니 삼만 원. 곧바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다시 열심히 찾다가 릭 에슬리(Rick Astley) 의 [Whenever You Need Somebody] 를 발견. 궁해 보였는지 팔천 원만 달라고 말씀하셨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는 찰나, CD 진열장에 양방언의 [Into the Light] 가 내 눈에 띄었다. 양방언의 [Into the Light] 로 말하자면, 내가 2019년 새해를 위한 음악으로 꼽은 음악 중 하나.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양방언 초기 음악에 푹 빠져있었던 터라, 일단 구매하고 보자는 생각이 앞서, 만 원을 주고 구매했다. 그렇게 발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친절해진 직원분께서 바이닐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동묘 스팟을 알려주신다며 우리와 함께 문을 나섰다.

그렇게 안내받은 레코드 샵 ‘종로 음악사’ 입구엔 LP가 종이 상자에 가득 담겨 있었으며, 기억에 남는 뮤지션으론 김종서, 조지 윈스턴, 케니 지, 조르주 무스타키 등이 있었다. 삼천 원에서 오천 원까지, 저렴한 가격이지만, 그리 구미가 당기지 않아 다른 박스를 디깅했는데, 시티팝 커버 아트가 연상되는 탁 트인 바다가 그려진 이오공감의 셀프 타이틀 [2.5.共.感]이 눈을 이끌더라. 가격은 오천 원이라니, 일단 킵해두고 또 살만한 앨범이 있을까 찾아봤는데, 한때 내 노래방 18번 곡이었던 '내 사랑 내 곁에'가 담긴 [김현식 VOL. 6]가 중간에 꽂혀있었다. (이 또한 오천 원) 고민 없이 집어 들고 이오공감, 김현식 두 앨범을 결제하기 위해 샵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웬걸? 샵 정중앙에 안익태 선생의 [한국 환상곡] 바이닐 커버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더라. ‘옛날에 많이 들었던 교향악인데, 분명 레어 음반일 거야’라는 생각이 앞섰지만, 아쉬운 마음에 파는 앨범이냐고 물어나 보았다. 사장님은 어제 오천 원 판들 사이 끼워 넣어 놨으니, 잘 찾아보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다시 종이 상자를 간절히 뒤적였고, 그 사이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안익태 선생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가격이 오천 원이라니, 다가올 삼일절, 폭발하는 애국심에 무조건 구매하기로 했다. 모모히키 팬츠를 입은 날이었지만, 대한 독립 만세를 속으로 외쳤다.
그렇게 구매한 바이닐은 릭 에슬리 [Whenever You Need Somebody], 이오 공감 [2.5.共.感], 김현식 [김현식 VOL. 6], 안익태 [한국 환상곡]. 번외로 조금 무리해서 구매한 양방언 [Into the Light] CD까지, 총 5장의 레코드를 구매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한정한 금액 이만 원을 훨씬 웃도는 삼만 삼천 원을 소비했다. 미션이었다면 난 미션 실패다. 판 상태가 어떠한지 아직 확인도 못 해봤다. 바이닐에 돈을 탕진할 때도 있지만, 웃기게도 집에 턴테이블은 없다. 마지막으로 동묘에서 느낀 점은 단 하나. 동묘 시장 가격이 절대 만만치는 않다는 점이다.

동묘 바이닐 구매 후기 (민수) 예산: 2만원

살면서 처음으로 동묘를 방문했다. 주머니에는 딱 현금 2만 원만 챙겼다. 홍대나 이태원의 레코드 샵에서는 바이닐 한 장을 겨우 살 수 있을 금액이지만, 세상 모든 중고 물건들이 천차만별의 가격으로 팔리고 있는 이곳에선 또 모른다. 심사숙고를 거쳐 최대한 여러 장의 바이닐 구매를 목표로 출발한다.
첫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조용히 둘러보려는 찰나, 친절한 주인 아주머님이 "누구의 무슨 음반을 찾느냐"고 전투적으로 물으신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일단 올드 락 아무나 대답하려 하는데 머리가 하얘졌다. 평소에 정말 고인물만 들어서 경각심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꼭 이럴 때만 아무도 기억이 안 난다. 아주머니가 누구 음반을 찾고 있냐고 재차 물으신다. 중학교 때 퀴즈를 내고 바로 대답 못 하면 앞으로 불러내셔 볼따구를 땡겨버리던 과학 시간의 기억이 스쳐갔다. 무서워서 일단 생각나는대로 수어사이드(Suicide)의 앨범이 있냐고 여쭤본다. 주인 아주머니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여긴 1994년까지 나온 레코드까지만 있어서 요즘 애들이면 없을거다” 하고 말씀하신다. 수어사이드는 1970년에 결성했다가 최근 고인이 되셨는데 요즘애들로 봐주시니 감사하기도 하고 여튼 단념하고 다른 것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저절로 발까지 들고 살금살금 구경하다가 프린스 앨범을 보고 반가워서 뽑아들었다. 한 장에 20만 원 인걸 보고 아주 조심조심 다시 모셔 넣어뒀다.
두 번째로 방문한 가게 돌레코드 에서도 무서운 기운이 감돌았다. 바로 직전의 가게는 박물관처럼 반듯하게 라벨링 된 해외음반들이 특징적이었다면, 이곳은 좀 더 동묘스러운 분위기의 공간이다. 사투리 디스코, 85년 MBC 신인가요제 대상 수상반 등이 눈에 띈다. 터진 테두리를 청테이프로 응급 처치한 음반도 많았고, 잘만 고르면 예산에 맞춰 중고반 여러 장을 구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빼곡히 꽂혀 있는 바이닐과 씨디장들을 조용히 구경해본다. 모리세이 씨디에 ‘문화부 허가’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국가가 허락한 모리세이... 유감스럽게도 바로 옆의 마릴린 맨슨은 유해매체로 분류당했는지 스티커를 허락받지 못했다.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나가려고 하니 무뚝뚝하시던 주인아저씨가 가게 앞 골목까지 바래다주시면서 저쪽으로 가면 싼 바이닐이 많다고 알려주신다. 갑작스러운 친절에 약간 당황했지만 인사를 드리고 그쪽으로 향했다.
역시 시장길을 따라 종이박스에 레코드를 쌓아두고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는 가게가 많았다. 쭈그리고 앉아 바이닐 디깅을 시작한다. 영국배경 영화에서 많이 보던 풍경이다. 쇼디치나 브릭레인의 중고시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선 박스 바로 옆에 놋주전자와 건강 팔찌, 애견 면도기도 같이 팔고 있다는 점.
이곳 야외 박스들에서 자주 출몰하는 바이닐들은 정해져 있는 듯했다. 케니 G 그리고 김종서씨와 여러 번 눈이 마주쳤다. 두 분 모두 염가로 책정되어 팔리고 계셨다. 선뜻 모셔오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아서 그냥 두었다. 그러다 [종로음악사]의 안쪽 매대에서 구매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을 마주쳤다. 핑크 플로이드 (Pink Floyd)의 ‘Wish You Were Here’, 그리고 스톤 로지스 (Stone Roses) 1집. 만 원 짜리 핑크 플로이드와 만 오천 원 짜리 스톤로지스 중 하나를 고르기로 마음먹는다. 익숙한 이 상황은 엄마가 좋으니 아빠가 좋니… 엄마가 로저 워터스인데 아빠가 이안 브라운이면요...

결국 핑크 플로이드로 마음이 기운다. 주인아저씨가 ‘Shine On You Crazy Diamond’ 가 실려있는데 당연히 이걸로 사야하지 않겠느냐 하고 바람을 넣어주신 덕도 있다. 덕인지 탓인지는 집에서 직접 플레이 해봐야 알겠지만. 이렇게 총 2만 - 1만 = 1만 원의 예산이 남았다. 다음 가게에선 전부 3000원이라는 박스를 뒤지다가 슬리브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드는 레코드를 발견했다. 읽지 못하는 독일어 틈에 헨델 (Hendel) 이라고 쓰여 있다. 사실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클래식을 모른다. 하지만 사서 들어보고 마음에 들면, 늦게 배운 헨델 팬이 무서운 법이라고 나의 클래식 입문 시대가 시작될 수도 있는 것이고, 혹시 레코드 상태가 너무 별로라 재생이 불가능하더라도 아름다운 컬러 하프 톤 디자인을 선반에 올려두는 것 만으로 3000 원의 가치를 다할 것 같았다. (실제로 이곳에선 재생 인생을 마감한 극 저퀄리티의 LP들을 인테리어 용으로 사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헨델 구매 결정. 남은 예산 7000원.
같은 박스에서 피터 가브리엘의 ‘So’ 도 집어 들었다. 지금은 대머리가 되었지만 커버 속에선 풍성한 머릿결을 자랑하고 계신다. 있을 때 잘하자 라는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사실 ‘So’ 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공유하기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바야흐로 2019년, 카디 비가 차트를 지배하고 릴 펌이 노래를 내는 때에, 피터 가브리엘 선배님은 많이 사랑하긴 해도 섣불리 집에 들여놓기는 어려운 그런 존재일지 모른다. 재미있게도 구매에 부스트를 실어준 데는 지난 1월 내한 공연을 했던 카일(KYLE) 에게 일정 부분 감사를 표한다. 그의 투어 매니저 또한 이 시대 흔치 않은 ‘피터 가브리엘 광인’이기 때문이다. 공연 전 삼겹살 불판 너머로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데이빗 보위를 좋아한다”라는 내 말 한마디에 완전히 무장 해제된 매니저가 “나는 피터 가브리엘도 사랑한다” 고 뜬금 고백해왔다. (그 둘이 무슨 관련인지는 의문이지만.) 그렇게 우리는 이 앨범 얘기를 했다. 대화의 요지는, ‘So’ 는 비록 전반적 톤은 외국 뽕짝이라 해도 ‘Mercy Street’ 과 ‘In Your Eyes’ 같은 명곡이 실려 있으므로 전혀 부끄러워 할 필요 없는 걸작이라는 결론이었다. 커버 속 피터 가브리엘의 눈을 들여다보니 그 맘 때 생각도 그리워지고 해서 남은 돈으로 엘피를 계산했다.
두 시간 반에 걸쳐 걸어 다닌 끝에 배도 고팠고, 추운 겨울날 엘피 박스 속을 바쁘게 솎아준 손가락 끝도 많이 얼얼했기 때문에 레코드 탐색은 여기까지 마치기로 했다. 집에 와서 틀어본 헨델 엘피는 조금 튀는 것 외에 잘 재생되고 슬리브 디자인도 여전히 아름답다. 기대처럼 늦게 배운 헨델 팬이 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 더 교양인이 된 기분이고 만족스러운 구매다. 가장 놀라운 점은 중고 피터 가브리엘의 훌륭한 음질 상태다. 칼바람 속에서 그를 픽미업한 내가 불쌍해서 동묘가 일으켜준 기적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신제품 이상의 부드러운 소리로 듣는 ‘Sledgehammer’는, 이 순간 만큼은 외국 뽕짝이 아니라 세기의 명곡이다.